[스크랩] 열하일기(熱河日記)
[동양고전]유머와 열정의 패러독스, 열하일기(고미숙 고전평론가)
필사본 『열하일기(熱河日記)』(단국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열하일기(熱河日記)
열린 마음으로 드넓은 세계를 보라
저자 박지원(朴趾源)
해설자 김명호(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조선조 1780년(정조 4)에 박지원(朴趾源)은 청나라 건륭(乾隆)황제의 70세 생신을 축하하기 위한 외교사절단에 참가하여 중국을 다녀올 수 있었다. 그 해 음력 5월 말 한양을 출발해서 압록강을 건넌 뒤 요동(遼東) 벌판을 거쳐, 8월 초 드디어 북경에 도착했다. 그런데 예기치 않았던 건륭황제의 특명이 내려, 만리장성 너머 열하(熱河)까지 갔다가,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약 한 달 동안 머문 뒤 그해 10월 말에 귀국했다. 당시 박지원이 세계적인 대제국으로 발전한 청나라의 실상을 직접 목격하고 이를 생생하게 기록한 여행기가 바로 『열하일기(熱河日記)』다.
「피서산장도(避暑山莊圖)」. 열하에 위치해 있는 피서지 그림이다.
열하는 북경에서 동북쪽으로 약 230km 떨어진 하북성(河北省) 동북부, 난하(濼河)의 지류인 무열하(武烈河) 서쪽에 있다. 열하라는 지명은 무열하 주변에 온천들이 많아 겨울에도 강물이 얼지 않는 데에서 유래했다. 건륭황제는 이곳에다 '피서산장(避暑山莊)'이라는 거대한 별궁을 짓고 거의 매년 행차하여 장기간 체류함으로써, 열하를 북경에 버금가는 정치적 중심지로 발전시켰다. 청나라의 국력이 최고조에 달했던 그의 치세 중에 열하는 황제를 알현하러 모여든 몽골·티베트·위그르 등의 외교사절들로 붐볐다.
박지원을 포함한 일행은 열하를 방문한 최초의 조선 외교사절이었다. 그래서 그는 열하에서 보고 들은 진귀한 견문을 자신의 여행기에 집중적으로 서술했을 뿐 아니라, 그 제목까지도 특별히 '열하일기'라 지었던 것이다.
독특한 유형의 연행록
청나라를 다녀온 여행기인 연행록(燕行錄)에는 대체로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는 일기 형식을 취해 여행 체험을 날짜순으로 기록하는 유형으로서, 김창업(金昌業)의 『연행일기(燕行日記)』를 비롯한 대부분의 연행록들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는 비교적 드물지만, 인물·사건·명승고적 등 견문의 내용을 주제별로 나누어 기록하는 유형으로서, 홍대용(洪大容)의 『연기(燕記)』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첫째 유형은 여행의 전 과정을 충실히 기록할 수 있는 반면, 중요한 사항들에 대해 집중적으로 서술하기는 어려우며, 중복되는 내용이 많아 산만하고 지루한 느낌을 주기 쉽다. 둘째 유형은 주제에 따른 집중적인 논의를 할 수 있지만, 그 대신 여행의 전 과정을 제대로 전하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
『열하일기』는 이와 같은 두 유형의 연행록들이 지닌 장점을 종합하면서, 아울러 그 나름의 창안을 가미하여 독특한 구성을 갖추고 있다. 우선, 주요 여정은 첫째 유형의 연행록처럼 날짜별로 충실히 기록해 나가되, 해당 일자의 기사에 포함시키기 힘든 중요한 사항은 독립된 한 편의 글로 서술해 두었다. 이는 둘째 유형의 연행록이 지닌 장점을 부분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열하일기』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특색은, 열하나 북경에 장기간 머물 때 얻은 잡다한 견문들을 시화(詩話)·잡록(雜錄)·필담(筆談)·초록(抄錄) 등 다양한 형식으로 정리하여 소개하고 있는 점이다. 『열하일기』는 「도강록(渡江錄)」부터 「금료소초(金蓼小抄)」까지 모두 25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시화와 잡록에 해당하는 것은 「행재잡록(行在雜錄)」, 「피서록(避暑錄)」, 「구외이문(口外異聞)」, 「황도기략(黃圖紀略)」, 「알성퇴술(謁聖退述)」, 「앙엽기(盎葉記)」, 「동란섭필(銅蘭涉筆)」 등이다. 이러한 시화나 잡록을 통해 박지원은 당시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청나라 학계와 문단의 최신 동향을 주로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속재필담(粟齋筆談)」, 「상루필담(商樓筆談)」, 「황교문답(黃敎問答)」, 「망양록(忘羊錄)」, 「혹정필담(鵠汀筆談)」 등 중국인들과 나눈 필담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필담들을 『열하일기』에 원고 그대로 싣지 않고, 독자들의 흥미를 끌 수 있도록 현장감을 살린 대화록으로 교묘하게 재구성해 놓았다.
그밖에도 중국 여행 중에 입수한 청나라의 공문서, 도서목록, 비문(碑文), 신간 서적 등 각종의 희귀한 자료를 초록하여 소개해 놓았다. 예컨대 『열하일기』의 마지막 편인 「금료소초」는 청나라 문인 왕사정(王士禎)이 지은 『향조필기(香祖筆記)』란 책에서 의약(醫藥)에 관한 내용을 초록한 것이다.
『열하일기』의 행로.
1830년대 초에 중국을 다녀온 바 있는 김경선(金景善)은 역대 연행록 중 가장 뛰어난 저술로 김창업의 『연행일기』, 홍대용의 『연기』,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꼽으면서, 『열하일기』는 '입전체(立傳體)'적 특징을 지닌 독특한 유형의 연행록이라고 보았다. 그가 말한 입전체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이후 중국 정사(正史)의 체제로 계승되어 온 기전체(紀傳體), 그 중 특히 열전(列傳) 형식을 가리킨다. 김경선은 『열하일기』가 단순한 여행 기록이 아니라 여행 도상에서 마주친 수많은 인간들을 생생하게 형상화한 일종의 '열전'이기도 하다는 점을 통찰한 것이라 하겠다.
중국 견문과 실학사상
내용상으로 볼 때 『열하일기』는 청나라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다방면의 현실에 대한 풍부한 견문과, 이에 기초한 박지원의 실학사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열하일기』의 곳곳에서 박지원은 청나라가 눈부신 번영과 정치적 안정을 이루고 있음을 생생하게 보고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청나라가 한족(漢族)뿐만 아니라 몽골·티베트 등 주변의 강성한 민족들의 저항을 억누르려고 무척 고심하고 있음도 놓치지 않고 꿰뚫어본다.
또한 박지원은 상업을 중심으로 청나라의 발전상을 다각도로 증언하면서,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개혁할 구체적 방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열하일기』에서 그는 도시마다 시장이 번창하고 있으며, 도로와 교량이 잘 정비되어 있어 수레와 선박을 이용한 교통이 원활한 점, 궁전을 비롯한 각종 건축들이 크고 화려하며 벽돌을 사용하여 견고한 점 등을 소개할 뿐만 아니라, 우리도 청나라처럼 벽돌을 널리 활용하고 수레를 전국적으로 통용하게 하자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청나라와 통상(通商)한다면, 국내의 산업을 촉진할 뿐 아니라 문명의 수준을 향상하고 국제 정세를 파악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발상을 전환하라
이러한 박지원의 실학사상은 청나라의 선진문물 수용을 통한 부국책(富國策)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 조선의 양반들은 경제보다 도덕을 중시하는 유교사상으로 인해 상공업이나 농업의 실무에 무지하고 무관심했다. 또한 청나라는 오랑캐요, 조선은 소중화(小中華)라는 의식이 골수에 박혀 청나라의 선진문물조차 싸잡아 배격했다. 그러므로 실학사상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양반들의 고루한 사고방식부터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열하일기』에서 박지원이 사물을 새롭게 인식할 것을 역설하고 있음은 바로 그 때문이다.
「산장잡기(山莊雜記)」편 중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에서 그는 마음을 차분히 다스림으로써 격류를 무사히 건널 수 있었던 자신의 체험담을 소개하며, 사물을 인식할 때 선입견이나 감각에 현혹되지 말고 주체적으로 사고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에서 난생 처음 코끼리를 본 충격을 표현한 「상기(象記)」에서는, 이 세계가 우리의 좁은 식견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로 가득 차 있음을 보여주면서, 이처럼 광활하고 경이로운 현실 세계에 대해 편견을 버리고 개방적인 자세로 탐구할 것을 요청한다.
이와 같이 박지원은 주체적이고 개방적인 인식을 강조할 뿐 아니라, 개인의 제한된 관점을 고집하지 말고 더욱 높은 차원에서 사물을 보도록 촉구하기도 한다. 「일신수필(馹汛隨筆)」편 7월 15일자 일기에서 그는 중국 여행 중에 본 장관(壯觀)을 논하면서, 남들처럼 명승고적이나 산천 풍물, 웅장한 건축과 번창하는 시장 따위를 꼽지 않았다. 그 대신 관점을 완전히 달리하여, 하찮은 '기왓조각'이나 '거름 똥'이야말로 중국의 첫째 가는 장관이라는 역설적인 주장을 편다. 중국인들은 깨어진 기왓조각으로 집의 담과 뜰을 아름답게 꾸미고, 버려진 똥을 남김없이 수거하여 알뜰히 비축하니, 청나라의 문물이 발달하게 된 비결은 이처럼 하찮은 물건이라도 철저히 활용하는 그 실용정신에 있다고 본 것이다.
소설보다 더 소설적인 여행기
『열하일기』에는 유명한 「호질(虎叱)」과 「허생전(許生傳)」이 실려 있다. 이 두 작품은 오늘날 박지원의 대표적 한문소설로 간주되고 있지만, 실은 우언(寓言)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호질」에서는 '범'과 '북곽(北郭)선생', 「허생전」에서는 '허생'과 대장(大將) '이완(李浣)'이라는 다분히 허구적인 존재들이 주고 받는 문답이 작품의 핵심을 이루고 있을 뿐더러, '범'이나 '허생'이 작자를 대신하여 펼치는 도도한 웅변에 작품의 흥미가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박지원은 이러한 우언의 형식을 빌어, 가급적 물의를 피하면서도 당시 양반들의 위선과 무능을 통렬히 풍자하는 한편 자신의 실학사상을 더욱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소설로 알려진 「호질」과 「허생전」에 소설적인 속성만으로는 설명되기 어려운 특징이 다분한 반면, 『열하일기』에는 얼핏 소설과 거리가 먼 형식을 취한 듯한 부분들에서 도리어 소설적인 특징이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특히 「도강록」 이하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에 이르는 전반부 7편은 압록강을 건넌 뒤 북경을 거쳐 열하에 갔다가 북경으로 되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을 기록한 일기임에도 불구하고, 소설식 표현 기법을 종횡무진 구사하여 소설보다 더욱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열하일기』에 나타난 소설적 특징으로서 첫째로 들 수 있는 것은, 여행 중에 겪은 아무리 사소한 사건일지라도 이를 장면 중심으로 교묘하게 구성하여 매우 풍부하고도 흥미있는 체험담으로 재현해낸 점이다. 또한 이와 같이 장면 묘사를 추구한 대목들에서는 육성을 방불케 하는 생기 있는 대화를 구사하고 있다. 중국인과의 대화는 반드시 구어체인 백화(白話)로 표현하여 실감을 더하고 있으며, 우리말 대화 장면에서는 조선식 한자어와 우리 고유의 속담을 구사하여 토속어의 맛을 살리면서 해학적 효과도 거두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열하일기』는 소설처럼 곳곳에 일종의 복선을 설정하여 가급적 사건의 서술을 짜임새 있고 흥미로운 것으로 만든다. 그 한 예로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편 8월 5일자 일기에서 북경에 막 도착한 일행에게 열하로 급히 오라는 황제의 명이 떨어져 소동이 벌어진 대목을 들 수 있다. 여기에서 박지원은 자초지종을 곧바로 밝히지 않고, 먼저 정사(正使) 박명원(朴明源)이 간밤에 열하로 가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이야기하는 장면부터 그린다. 그러고 나서, 숙소에 난데없는 소란이 일어나 그 원인을 알지 못한 일행이 법석을 피우고 청나라 통역관들이 허둥대는 우스꽝스런 모습을 묘사하여 독자들의 궁금증을 잔뜩 돋운 뒤에야 비로소 열하 여행이 갑작스레 결정된 경위를 밝힘으로써, 사건을 한층 더 흥미 있게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아울러, 『열하일기』는 소설처럼 정밀한 세부묘사를 통해 대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려는 경향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열하일기』의 도처에서 박지원은 여행 도중에 보고 겪은 자연 풍경과 기상(氣象) 변화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이역만리의 낯선 땅을 직접 여행하는 듯한 실감을 자아내게 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또한 그는 수레와 기계류, 벽돌을 이용한 건축물, 선박과 교량 등 청나라의 갖가지 문물에 대해서도 과학적인 엄밀성을 갖추어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열하에서 구경한 중국의 신비로운 마술들이나 청나라 황제에게 진상한 세계 각국의 기이한 새와 짐승 따위를 여실하게 묘사함으로써, 이 세계가 경이로운 현상들로 가득 차 있음을 충격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겨울에도 얼지 않는 열하의 온천.
소설식의 사실적인 표현은 여행 도중에 마주친 청나라 각계각층의 인물들과 조선 사행의 구성원들을 묘사한 대목들에도 뚜렷이 드러나 있다. 그 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각종 상인, 직업적인 연희인(演戱人), 시골 훈장, 점쟁이, 도사, 승려, 창기, 하녀, 거지 그리고 조선 사행 중의 병졸이나 말몰이꾼, 박지원 자신의 하인 등등, 다른 연행록에서는 거의 무시되기 일쑤인 하층 민중들을 자못 애정 어린 시선으로 묘사한 점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인물들 가운데 가장 탁월하게 묘사되어 있는 인물은 다름 아닌 박지원 자신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비대한 몸집이나, 농담 좋아하고 겁 많은 성격조차 솔직하게 그려 보인다. 그리하여 『열하일기』에서 박지원은 청나라의 문물을 탐구하고 개혁 방안을 모색하는 진지하고 사려 깊은 선비일 뿐만 아니라, 소탈하고 인정이 많으며 인간적 약점도 지닌 인물로 매우 개성 있게 부각되어 있다.
해학과 풍자의 재미
『열하일기』는 소설처럼 씌어졌을 뿐더러 해학과 풍자가 넘치기에 더욱 재미가 있다. 박지원은 여행 도중에 목격한 우스운 사건들을 놓치지 않고 기록할 뿐 아니라, 수시로 일행들을 웃기는 자신의 익살스러운 언동에 대해서도 거리낌 없이 그려낸다. 그러나 『열하일기』에서 해학은 그러한 가볍고 유희적인 웃음으로만 나타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사상을 피력하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으로 해학과 풍자를 즐겨 구사한다. 진지한 사상적 논의를 펼 때마다 돌연 우스운 이야기를 덧붙임으로써,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그러한 대목에 여유와 활기를 불어넣는 것이다. 「도강록」편 6월 28일자 일기에서 박지원이 동행인 정진사(鄭進士)를 상대로, 성을 쌓는 데에는 벽돌이 돌보다 낫다고 조목조목 논하는 장광설을 펴자, 그 사이 졸고 있던 정진사가 깨어나, "내 이미 다 들었네. 벽돌은 돌만 못하고, 돌은 잠만 못하다면서"라고 대꾸하여 웃음을 자아내는 대목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해학과 풍자는 당시 사람들의 고루한 사상을 깨뜨리는 데도 뛰어난 효과를 발휘한다. 「망양록」편에서 왕민호(王民皞)는 박지원이 양고기를 먹지 않는 것을 보고, "선생은 제(齊)·노(魯) 같은 대국(大國)을 즐기지 않습니까?"하고 농담을 했는데, 이는 고사(故事)를 이용하여, 박지원이 소국에서 왔기 때문에 대국의 음식 맛을 모른다고 놀린 말이었다. 그러자 그는 즉시 "대국은 노린내가 나서요" 하고 응수함으로써 왕민호를 무안케 하고 만다. "양고기는 노린내가 나서 싫다"는 뜻의 이 해학적인 답변은 "청나라가 비록 대국이지만 노린내 나는 오랑캐의 나라가 아니냐"는 풍자의 의미도 함축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세계화시대에 다시 주목받는 고전
지난 1990년대 이후 『열하일기』는 박지원의 실학사상을 담은 사상서로서만이 아니라 그의 문학을 대표하는 탁월한 문예작품으로도 재인식되면서, 그에 관한 연구가 학계에서 갈수록 활발해지고 있다. 이와 더불어 언론사에서도 『열하일기』에 주목하고, 압록강을 건너 열하까지 갔던 박지원의 여행길을 추적하는 기획을 다투어 추진했다. 그 결과물로 여행기들이 잇달아 신문에 연재되거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고, TV 다큐멘터리도 이미 여러 차례 제작·방영되어 대중의 관심을 모은 바 있다. 그로 인해 『열하일기』 번역본을 찾는 독자들이 날로 늘고 있으며, 열하 여행도 이제 관광코스의 하나로 정착되어가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 이른바 세계화시대인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열하일기』는 어떤 현대적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이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필자는 『열하일기』 「도강록」 7월 8일자 일기 중의 일부를 소개해 두었다. 광활한 요동 벌판을 처음 대면하고 감격한 박지원이 이곳이야말로 "통곡하기에 좋은 장소"라고 외친 대목이다. 당시 조선의 선비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좁은 국토를 벗어날 수 없었으며 이를 숙명으로 알고 살았다. 그런 실정에서 더욱이 박지원은 일찍부터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연구해 왔던 만큼, 꿈에도 그리던 중국 여행이 실현되었을 때 그 감격이 어떠했겠는가. 저 요동 벌판과 같이 한없이 드넓은 세계로 나선 해방의 기쁨은 통곡으로밖에는 표현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박지원과 달리, 해외여행을 자유로이 할 수 있고, 게다가 전 세계가 급속히 하나로 통합되어 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시대에 살면서도 여전히 우물 안 개구리식의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은가. 반면 세계화의 도도한 물결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그에 표류하지 않고 주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이 우리 시대의 화두(話頭)라고 한다면, 『열하일기』는 그에 대해 훌륭하게 응답하는 고전이 될 수 있으리라 본다. 열린 마음으로 드넓은 세계를 보도록 깨우치는 『열하일기』야말로 세계화시대에 다시 주목되어야 할 값진 문학적 유산이 아닐까 한다.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2006. 9. 18., 휴머니스트)